한국정부는 <강제연행>의 증거를 내놓으라 --- 이께다 노부오

アゴラ編集部

ここ数週間で日韓関係が緊張し、政府間においてもマスメディア、ネットメディアにおいても、また両国民の間でも相互の理解がなかなか得られない状況が続いています。こうした両国間の誤解の原因や齟齬の理由は、問題についての本質的合意に至らず事実関係が正しく認識されていないことも大きいと考えます。

そのためアゴラでは、日韓関係の問題においては異言語を乗り越えた理解深化と誤解解消も必要と考え、アゴラへ掲載された日韓関係の議論について今回試験的に過去の日本語記事をハングルに翻訳して掲載します。政治的、およびナショナリズムに影響されたバイアスを可能な限り排除し、両国間、両国民間の相互理解をより一層深めるための正当な議論が行われることをアゴラは期待します。

また、ハングルでの投稿については、ほかの投稿と同様、Facebookのコメント欄にて意見異論反論などを受け付けております。

※今回、ハングルへ翻訳した元日本文記事は、池田信夫「韓国政府は「強制連行」の証拠を出せ」。


요 몇주사이에 한일관계가 긴장되어, 정부간에 있어, 매스미디어, 인터넷미디어에 있어서도, 또한 양국민 사이에서도 상호이해가 좀처럼 얻어지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국간의 오해의 원인이나 엇갈림의 이유는, 문제에 대한 본질적 이해없이 사실관계가 바르게 인식되어지지 못하고 있는 점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아고라에서는, 한일관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언어의 벽을 뛰어넘는 이해 심화와 오해 해소도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아고라에 게재된 한일관계의 의논에 대해 이번에 시험적으로 과거의 일본어 기사를 한글로 번역해서 게재합니다. 정치적, 또한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는 바이어스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양국간, 양국민간의 상호이해를 한 층 더 깊이하기 위한 정당한 의논이 행하여지는 것을 아고라는 기대합니다. 또한, 한글 투고에 대해서는, 다른 투고와 마찬가지로, Facebook 커멘트란을 통하여 의견, 다른 의견, 반론등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정부는 <강제연행>의 증거를 내놓으라
이께다 노부오

한국 미디어가 “위안부가 군에 폭행, 협박을 받아서 끌려간 증거는 없다. 있다면 한국에서도 내놓아주길 바란다.”라는 하시모또 시장의 발언에 <망언>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나, 이것은 하시모또씨가 100% 맞다. 이 문제가 복잡하게 엉키는 한 원인은, 다음의 세가지 문제가 혼동되는 점에 있다.

  • 군이 위안소의 경영에 관여했는가
  • 군이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는가
  • 위안부의 노동실태가 비참한 성노예였는가

우선 군이 위안소의 경영에 관여했던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로, 일본 정부도 부정하고 있지 않다. Wikipedia에도 많은 사례가 모아진 것처럼, 어느 나라에서나 병사의 성처리를 군이 관리하고 있었다. 위험한 전쟁터에서, 군이 관여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1991년 내가 취재했을 때도, 위안부를 포함한 조선인 노동자를 일본군의 배로 운반한 것을 나타내는 문서가 삿뽀로의 공문서관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아사히신문이 <관여>를 <강제연행>과 혼동해서 보도하였기 때문에, 후꾸시마 미즈호씨등의 변호단은 <기생으로 팔렸다>라는 원래 위안부의 증언을 <병사에게 강제연행되었다>라고 바꾸어 썼다. 당연히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은 후퇴하여 <군에 의한 강제는 없었으나, 업자에 의한 넓은 의미의 강제가 있었다>라는 말로 슬쩍 바뀌었다. 하지만 법정에 나온 것은, 원래 위안부의 <억지로 끌려갔다>라는 말 뿐이다. 원고의 증언만으로 피고를 유죄로 할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재판은 전부 원고패소).

일본정부의 조사에서도, 강제연행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외무성은 코노담화에서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아졌다>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정치결착을 시도하였다. 이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은> 주어는 누구일까. 군이 위안부를 모은 사실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위안소 경영자이다. 이를 <성노예>라고 부른다면, 노예로 한 것은 업자이지 나라는 아니다. 실은, 이것은 요시미 요시아끼씨등 좌익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사실 인식은 하따 이꾸히꼬씨와 거의 차이가 없다.

이것을 암네스티나 NY타임즈등의 구미 미디어는 <여성의 인권침해>로 잘못 이해하고서 <전시 성폭력>을 규탄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된 것이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관리한 것은, 병사가 여성을 강간해서 민간인을 적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목적이었다. 오노다 히로오씨가 당시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영상] 오노다 히로오씨 종군위안부를 말하다

위안부의 많은 수가 조선인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응모가 많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조선은 가난하여, 월수300앵(지금의 150만앵=대략 2천166만원) 이상이나 수입이 있는 위안부는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잘나가는 사람의 경우, 종전시 2만6000앵(현재의 1억3천만앵=대략 18억8천만원)이나 저금을 모았다. 전후 행하여진 미군의 조사는, 위안부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녀들은 원하는 것을 살 만큼의 많은 돈을 갖고 있어, 생활 수준은 양호했다. 그녀들은, 옷, 신발, 담배를 살 수 있었고, 집에서 위문봇다리를 받아들은 많은 군인들로부터 많은 선물로 화장품을 충당할 수 있었다. 장병과 더불어, 스포츠, 피크닉, 오락, 사교디너등을 즐겼다. 축음기를 가지고 있었고, 쇼핑 가는 것도 허락되었다. 접객을 거부할 자유도 있었기에, 군인이 만취해 있을 때는 거부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위안부의 노동실태는 <성노예>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전후 60년 이상 지나서 정부간 교섭할 만한 사안은 아니다.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일본군이 한국 여성을 폭력으로 연행한 사실이 판명된 경우만이므로, 하시모또씨가 말하는 것처럼, 우선 한국 정부가 <강제연행>의 물적 증거를 내놓아야만 한다.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