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기회에 아사히 신문의 오보와 날조의 역사를 돌이켜 보자. 그들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다. 지난 비밀보호법 반대 캠페인에서 그들은「치안유지법이 신문의 자유를 빼아았다」고 하었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치안 유지법이 아사히에 적용된 적은 한번도 없다.
아사히는 만주 사변이후 영업방침으로 전쟁 협력을 결정했던 것이다. 1931년 10월 1일부 오사카 아사히는 사설에서 「만주가 독립국으로 새 출발을 하는데 대하여 환영 할지언정 반대 할 이유는 없다」라고 하었다. 이것은 그때까지의 반군 방침의 대전환이었고 종군기자의 보도는 부수를 크게 늘렸다.
아사히는 어째서 방향을 크게 바꾸었는가. 아사히의 사사에서는 재향군인회의 불매 운동이 이유라고 되어 있지만 그렇게 단순하고 소극적인 전환이 아니었다. 이후에 아사히는 전선 확대에 신중했던 육군 수뇌보다 적극적으로 청년 장교를 선동 했던 것이다. 일・미 전쟁을 부추겨 「귀축미영(鬼畜米英)」이라는 슬로건을 생각해낸것도 아사히그라후이다.
그 하나의 원인은 아사히가 혁신파의 신문이였다는데 있다. 오가타 다케토라 이하 류우 신타로 나 후루카키 데츠로 등의 스타 기자는 모두 「리버럴」로서 사회주의에 동감하고 일본을 계획경제화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육군 통제파의 국가 사회주의 이념에 가까웠고 그를 통해 고노에 후미마로와의 관계가 깊어졌다.
고노에도 신문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아사히에 정보를 제공 하었고 아사히는 「일국일당형 식의 신당으로 일본을 혁신 해야 한다」라는 논조를 취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대정익찬회가 결성되고 오가타는 「신체제」의 간부가 되었다. 그 후 아사히는 「신체제 지지」의 입장에 서서 국가 총동원 체제의 기둥이 되었다.
이러한 신체제의 이론적 지주가 된 것이 류우의 「일본 경제의 재편성」에서 볼 수 있는 통제 경제의 사상이다. 류우는 자본과 경영을 분리하어 경영자가 계획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신문은(주주의 의향에 좌우되지 않는) 천하 국가의 입장에서 국책을 논하어야 한다고 하었다 .
이와 같이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사상이 육군에게 이용 된것이다. 전쟁 전 리버럴이 결과적으로는 고노에의 총동원 체제에 합류하어 전쟁에 협력한 역사를 마루야마 마사오는 「간부 리버럴리즘의 한계」라고 표현했다. 국가의 경제 개입을 긍정하는 리버럴리즘은 총동원 체제와 친화성이 강하고 「흐름」에 저항하지 못했던것이다.
전쟁 전 아사히 신문의 탈선 원인은 치안 유지법도 이익 유도도 아니다. 타사와의 경쟁 속에서 신문을 팔려고 하는 열의와 천하 국가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거짓말은 허용된다는 선의로 부터 대본영발표를 계속 보도 한것이다.위안부 보도에서도 원자력 보도에서도 리버럴한 「혁신」의 입장을 보이고 있는 아사히의 자세는 전쟁 전과 다를 바 없다 . 거기에 최대의 함정이 있음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アゴラ編集部:以上は、アゴラ 2014年8月8日掲載の「朝日新聞の「革新派」戦争を主導した」をハングル翻訳ボランティアのご協力により再掲したも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