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언론 아리나 에서 스즈키 히로시씨와 나눈 이야기인데 90년대에 위안부 문제가 거론 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65년의 한일 조약때에는 잠잠했었고 요시다 세이지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 것도 1980년 즈음이었다. 90년대에 비로서 문제 삼게 된것은 냉전 종료에 관계가 있다.
사회주의는 냉전과 함께 사라지고 일본의 「평화 세력
의 간판이었던 비무장 중립의 리얼리티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를 무마하기 위해 「아시아와의 연대
를 주장하고 타국의 반일 운동에 편승하게 되었다. 선두에 선것이 위안부 문제를 사회적 여론으로 이끌어낸 후쿠시마 미즈호씨였다.
기사거리를 찾던 매스컴도 「아시아의 적
이라고 일본의 책임을 추궁하게 되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적대시하는 이야기를 거의 들을 수가 없어 사회의 이목은 중국 과 한국에 집중하었다. 1991년에 위안부 문제가 거론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좌익의 구실 찾기에 있었던 것이다.
사회주의가 붕괴된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영미에서는 이와 동시에 「보수 혁명
이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했다
는 역사의 흐름 앞에 리버럴은 기가 죽고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진행되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대통령, 영국에서는 블레어 수상 때, 「복지국가
의 비대화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일본에서도 나카소네 정권은 이러한 흐름을 타서 국철이나 일본전신전화공사의 민영화를 실행하었다. 오자와 이치로씨가 1991년에 수상이 되었으면 그가 자민당에서 좌파세력을 몰아 내고 일본판 마가렛 대처가 되었을런지도 모르나 그는 당내에서 고립하었고 당을 해산하고 호소카와 정권을 세운후에는 오산의 연속이었다.
그 때 오자와씨가 사회당같은 좌파와 손을 잡은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그는 와타나베 미치오씨같은 자민당 우파를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뜻 대로 되지 않았다. 실지로는 「초보수당
이었던 사회당은 자민당에 속아 무라야마 정권과 더불어 자괴 하었다. 자민・사민・사키가케연립정권이 정책의 대립축을 망가드린 근원이다.
그 후에는 스즈키씨도 말하듯이 일본 정치는 「잃어버린 20년
을 지냈다. 보수 혁명에 패한 구미의 리버럴은 피케티에서 볼 수 있듯이 이론 무장하고 있지만 일본의 「전후 리버럴
은 사분오열하고 집단적 자위권이나 위안부 문제등 비무장 중립의 꿈을 아직껏 쫓고 있다. 이 낙차 해소에는 「희망을 버리는 용기
가 필요할런지도 모른다.
アゴラ編集部:以上は、アゴラ 2014年8月21日掲載の池田信夫氏のエントリー「なぜ90年代に慰安婦問題が出てきたのか」をハングル翻訳ボランティアのご協力により再掲したものです。また、本文のリンク先は日本語です(링크처는 일본어입니다)。